붕당정치를 끝내려 한 두 군주, 영조의 완론탕평 vs 정조의 준론탕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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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당파"라는 말, 역사 시간에 한 번쯤 들어보셨죠? 조선을 이끌던 신하들이 학문과 정치적 견해에 따라 나뉘어 서로를 견제하고 비판하던 '붕당정치'. 처음에는 건강한 토론 문화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상대 붕당을 죽고 죽이는 권력 투쟁으로 변질되어 나라의 근간을 흔들었습니다. 여기, 극심한 정쟁의 폐해를 끊고 왕권을 강화하여 조선의 새로운 부흥을 이끌고자 했던 두 명의 위대한 군주가 있었습니다. 바로 영조와 정조입니다. 😊
나라를 병들게 한 '붕당정치', 탕평책은 왜 필요했나?
조선 중기 이후, 정치는 노론, 소론, 남인, 북인 등 여러 붕당이 주도했습니다. 이들의 대립은 숙종 대에 이르러 '환국(換局)'이라는 이름 아래, 한쪽 붕당이 다른 쪽을 완전히 몰아내는 피의 숙청으로 이어지며 극에 달했죠. 그 결과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민생을 위한 정책보다는 당파의 이익을 위한 다툼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왕위에 오른 영조는 왕권을 회복하고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 '탕평책'이라는 강력한 개혁 카드를 꺼내 들게 됩니다.
'치우치거나 편들지 않아 공평하다'는 의미입니다. 중국 고전 「서경」의 "무편무당 왕도탕탕(無偏無黨 王道蕩蕩)"에서 유래한 말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정치를 펼치겠다는 왕의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영조의 '완론탕평': "싸우지 말라" 탕평비를 세우다 👑
영조가 펼친 탕평책은 **'완론탕평(緩論蕩平)'**이라 불립니다. 이는 '온건한 논의를 바탕으로 한 탕평'이라는 뜻으로, 쉽게 말해 "제발 좀 싸우지 말고 잘 지내라"는 방식이었습니다. 영조는 각 붕당의 과격파를 배제하고, 온건한 인물들을 고루 등용하여 정치를 안정시키고자 했습니다.
영조의 의지는 성균관 입구에 세운 '탕평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두루 원만하고 편당을 짓지 않는 것이 군자의 마음이요, 편당만 짓고 원만하지 못한 것이 소인의 마음이다"라는 글귀를 새겨, 당파를 초월한 정치를 향한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죠. 또한, 붕당의 근거지였던 서원을 대대적으로 정리하여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정조의 '준론탕평': "옳고 그름을 가리자" 규장각을 세우다 📚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조금 다른 방식의 탕평책을 펼칩니다. 바로 **'준론탕평(峻論蕩平)'**입니다. 이는 '엄격한 논의를 바탕으로 한 탕평'으로, "옳고 그름(시시비비)을 명확히 가리겠다"는 방식이었습니다. 무조건 섞는 것이 아니라, 왕이 정책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옳은 주장을 하는 인재는 과감히 등용하고 그릇된 주장을 하는 세력은 배척하며 국정을 주도해나간 것이죠.
이를 위해 정조는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강력한 학술 및 정책 연구 기관으로 육성했습니다. 이곳에서 당파에 얽매이지 않는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직접 선발하고 교육('초계문신제')하여 자신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할 친위 세력으로 키웠습니다. 왕이 직접 '학문'을 통해 신하들을 이끌며 정치의 중심에 서려 한 것입니다.
영조 vs 정조, 한눈에 보는 탕평책 비교 ⚖️
구분 | 영조 (완론탕평) | 정조 (준론탕평) |
---|---|---|
핵심 철학 | "싸우지 말자" (화합, 공존) | "옳고 그름을 가리자" (시시비비) |
인재 등용 | 각 붕당의 온건파 인물 등용 | 왕의 정책에 동의하는 인물 중심 등용 |
주요 정책 | 탕평비 건립, 서원 정리 | 규장각 설치, 초계문신제 실시 |
탕평책 핵심 요약
자주 묻는 질문 ❓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붕당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고 나라를 안정시키려 했던 영조와 정조. 두 왕의 탕평책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갈등을 어떻게 조정하고 통합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여러분은 어떤 리더십에 더 마음이 가시나요? 궁금한 점은 댓글로 남겨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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