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 셔먼호 사건: 대동강에서 불탄 미국 상선, 신미양요의 서막

 

대동강을 거슬러 온 미국 상선, 그 최후는? 1866년 조선을 뒤흔든 제너럴 셔먼호 사건! 조선과 미국의 첫 군사 충돌이자 5년 뒤 벌어질 신미양요의 도화선이 된 그날의 이야기를 자세히 파헤쳐 봅니다.

1866년 음력 7월, 평양 대동강 물길을 거슬러 한 척의 낯선 서양 배가 나타났습니다. 검은 연기를 뿜으며 다가오는 이 배의 이름은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 이 배의 등장은 고요했던 조선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고, 조선과 미국 간의 첫 번째 군사적 충돌로 기록되었습니다.

과연 이 배는 왜 머나먼 대동강까지 오게 되었으며,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을까요? 오늘은 쇄국정책의 정점에 있던 조선과 통상을 요구하던 서양 세력이 정면으로 부딪힌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1866년 조선, 폭풍전야의 시대 🤔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조선의 상황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1866년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왕권 강화와 함께 서양 세력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하는 **'쇄국정책(鎖國政策)'**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해 초(1866년 초)에는 조선 내 천주교 신자들과 프랑스 선교사들을 대대적으로 처형한 **'병인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서양에 대한 적대감과 경계심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죠. '이양선(異樣船, 모양이 이상한 배)'의 등장은 그 자체로 국가적인 위협으로 간주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제너럴 셔먼호, 왜 대동강에 나타났나? 📊

제너럴 셔먼호는 미국 소유의 무장 상선이었습니다. 이 배에는 미국인 선원 외에도 영국인, 말레이시아인, 그리고 중국인 선원들이 타고 있었죠. 특히 주목할 만한 인물은 영국 출신의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Robert Jermain Thomas)**였습니다.

이들의 공식적인 방문 목적은 '통상(무역)' 요구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 이들의 행동은 매우 의심스러웠습니다.

  • 공식 목적: 조선과의 무역 및 통상 요구
  • 비공식 목적 (추정): 천주교 박해에 대한 정보 탐색, 선교 활동(토머스 선교사), 심지어 왕릉 도굴에 대한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 무장 상태: 단순 상선이라고 하기엔 대포 등으로 중무장한 상태였습니다.
💡 알아두세요!
제너럴 셔먼호는 미국 해군 소속의 군함이 아닌, 민간인 소유의 '사설 무장 상선'이었습니다. 이는 나중에 미국 정부가 이 사건을 외교적으로 '민간인 학살'로 규정하고 군대를 파견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불허' vs 셔먼호의 '도발' ⚔️

조정의 허가도 없이 황해도를 지나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들어온 셔먼호.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를 비롯한 조선 관료들은 즉각 이들에게 퇴거를 명령했습니다.

조선 측은 쇄국정책에 따라 통상은 절대 불가함을 알리면서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식량과 물을 제공하겠으니 즉시 떠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셔먼호는 이를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셔먼호는 물길을 안내하던 조선의 중군(中軍) **이현익을 납치**하고, 식량을 가져온 조선 관료들을 감금하는 등 도발적인 행동을 감행했습니다. 심지어 경고하는 조선군을 향해 대포를 발사하여 사상자까지 발생시켰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며칠간 내린 비로 불어났던 대동강 물이 줄어들면서 셔먼호는 강바닥 모래톱에 좌초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대동강의 격돌과 셔먼호의 최후 🔥

불법 침입, 관리 납치, 그리고 선제 포격까지. 셔먼호의 도발에 평양감사 박규수는 마침내 결단을 내립니다. 단순한 통상 요구가 아닌, 명백한 '침략 행위'로 규정한 것입니다.

좌초된 셔먼호를 향해 조선 관군과 평양 백성들이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무기로는 셔먼호의 철갑을 뚫기 어려웠습니다. 이때 사용된 것이 바로 **'화공(火攻)'**이었습니다.

📝 셔먼호 격침 과정

  1. 좌초: 셔먼호가 대동강 모래톱에 좌초됨.
  2. 화공 준비: 평양 군민들이 땔감과 유황을 실은 작은 배(거룻배) 여러 척을 준비함.
  3. 공격: 불을 붙인 배들을 셔먼호에 충돌시킴.
  4. 격침: 불길에 휩싸인 셔먼호는 탄약고가 폭발하며 완전히 불타 침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선교사 토머스를 포함한 셔먼호의 선원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토머스 선교사는 죽는 순간까지 강기슭의 조선인들에게 성경을 던져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사건의 여파: 신미양요(辛未洋擾)의 불씨 📚

이 사건은 조선 내에서는 '이양선을 격퇴한 승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서양 세력을 물리쳤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전국에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게 됩니다.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반면, 미국은 이 사건의 정확한 전말을 알지 못했습니다. 수년간 셔먼호의 행방을 쫓던 미국 정부는 이 사건을 '조선에 의한 미국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규정했습니다.

결국, 셔먼호 사건 발생 5년 뒤인 1871년, 미국은 사건의 진상 규명과 통상 조약 체결을 명분으로 아시아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를 침공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미양요(辛未洋擾)'**입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신미양요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주요 사건 연표

연도 사건 관련 국가 결과
1866년 1월 병인박해 조선 (vs 천주교) 프랑스 선교사 처형
1866년 8월 제너럴 셔먼호 사건 조선 vs 미국 셔먼호 격침
1866년 10월 병인양요 조선 vs 프랑스 조선군 승리, 외규장각 도서 약탈
1871년 6월 신미양요 조선 vs 미국 조선군 격렬 저항, 척화비 건립
⚠️ 핵심 정리!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은 '원인'이 되었고, 신미양요(1871)는 그 '결과'로 일어난 미국의 보복성 침공이었습니다. 두 사건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무리: 쇄국과 개항의 갈림길에서 📝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쇄국을 지키려던 조선과 개항을 요구하던 서양 세력 간의 피할 수 없었던 비극적인 충돌을 상징합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주권을 침해한 침략자를 격퇴한 '승리'였지만, 미국의 입장에서는 통상을 요구하다 '학살'당한 사건이었죠.

이 사건은 결국 더 큰 무력 충돌(신미양요)을 불러왔고, 조선은 결국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으며 원치 않았던 개항의 문을 열게 됩니다. 제너럴 셔먼호의 불탄 잔해는 쇄국과 개항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갈림길에 섰던 19세기 조선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궁금한 점은 댓글로 물어봐주세요~ 😊

💡

제너럴 셔먼호 사건 요약

✨ 배경 (1866):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병인박해로 서양에 대한 적대감 최고조.
📊 발단: 미국 무장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평양 대동강 진입.
🧮 전개: 조선의 퇴거 명령을 무시하고, 조선 관리를 납치, 포를 쏘며 도발함.
👩‍💻 결과: 평양감사 박규수의 지휘 아래 조선 관군과 백성들이 화공(火攻)으로 격침시킴.

자주 묻는 질문 ❓

Q: 제너럴 셔먼호는 상선인데 왜 무장하고 있었나요?
A: 19세기 당시 서양 상선들은 해적의 위협이나 미개척지에서의 돌발 상황에 대비해 자체적으로 대포 등을 싣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셔먼호 역시 그런 '무장 상선'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무기를 소지한 것보다, 이를 조선 관군을 향해 먼저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Q: 선교사 토머스는 정말 성경을 던지며 죽었나요?
A: 이 이야기는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며 널리 알려진 일화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 장면을 명확히 교차 검증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 일화는 당시 서양 세력의 '선교' 목적과 조선의 '척결' 의지가 충돌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Q: 박규수는 왜 그렇게 강경하게 대응했나요?
A: 박규수는 당시 평양감사로서 국가의 '쇄국정책'을 따라야 했습니다. 또한 셔먼호는 단순한 표류 선박이 아니라, (1) 허가 없이 영해(강)를 침범했고, (2) 관리를 납치했으며, (3) 먼저 대포를 쏜 명백한 '침략자'였습니다. 따라서 주권 수호 차원에서 강경하게 대응한 것입니다.
Q: 미국은 왜 5년이나 지나서 신미양요를 일으켰나요?
A: 당시에는 통신이 발달하지 않아 셔먼호의 정확한 소식을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또한 미국은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내 문제 수습에도 바빴습니다. 이후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고 함대를 조직해 조선에 원정을 오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Q: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조선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무엇인가요?
A: '서양 오랑캐를 물리쳤다'는 자신감을 흥선대원군에게 심어주어,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국에 '척화비'를 세운 것이 그 상징적인 결과입니다. 이는 결국 조선의 근대화와 개항을 늦추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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