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양요(프랑스) vs 신미양요(미국) 완벽 비교 (원인, 결과,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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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를 하다 보면 '병인양요', '신미양요'라는 이름을 나란히 배우게 되죠. 둘 다 '강화도'에서 일어났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저도 학창 시절에 이 두 사건이 왜 이렇게 연달아 터졌는지, 왜 하필 강화도에서 싸웠는지 참 궁금했던 기억이 납니다. 😊
이 두 차례의 '양요(洋擾)'는 서양 세력과 조선이 정면으로 충돌한 역사적인 사건이자,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얼마나 강경했는지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습니다. 오늘은 이 격동의 시기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격랑의 19세기, 조선의 문은 왜 닫혔나? 🤔
19세기 중반, 조선 바다에는 '이양선(異樣船)'이라 불리는 낯선 서양 배들이 출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의 문을 두드렸죠. 하지만 이웃 나라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처참히 패배했다는 소식은 조선 조정을 큰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습니다.
이때 어린 고종을 대신해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즉 **쇄국정책**을 펼칩니다. 서양 세력을 '교류'의 대상이 아닌 '침략자'로 규정한 것이죠.
여기에 국내에 퍼지고 있던 천주교(서학) 역시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조상 제사를 거부하고 평등 사상을 전파하는 천주교가 유교적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고, 나아가 서양 침략의 앞잡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프랑스의 침공: 병인양요 (1866) 🇫🇷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탄압하기 위해 1866년, '병인박해'를 일으켜 프랑스인 선교사 9명과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를 처형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 극동함대는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합니다. 이것이 바로 **'병인양요(丙寅洋擾)'**입니다.
프랑스군은 막강한 화력으로 강화성을 점령했지만, 조선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특히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크게 격파했죠. 결국 프랑스군은 조선의 완강한 저항과 추위 등으로 인해 별다른 성과 없이 물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은 강화도에 보관 중이던 왕실 서고, **'외규장각'**의 귀중한 도서와 은괴 등을 약탈해 갔습니다. 😥 (이때 약탈당한 의궤들은 2011년에야 영구 임대 형식으로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침공: 신미양요 (1871) 🇺🇸
병인양요가 있기 몇 달 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서 횡포를 부리다 평양 군민들에 의해 불타 침몰하는 사건(**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있었습니다.
5년 뒤, 미국은 이 사건을 빌미로 아시아 함대를 이끌고 다시 강화도를 침략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미양요(辛未洋擾)'**입니다.
미군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초지진, 덕진진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강화도의 마지막 보루인 '광성보'에 도달했습니다. 이곳에서 **어재연 장군**과 조선군은 수적, 무기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절대 물러설 수 없다"며 백병전까지 벌이며 처절하게 항전했습니다. (이때 미군에 빼앗긴 어재연 장군의 '수(帥)'자 깃발이 유명하죠.)
군사적으로는 조선군이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지만, 조선은 끝까지 통상 조약 체결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미국도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하다고 판단, 아무런 외교적 성과 없이 스스로 물러나게 됩니다.
병인양요 vs 신미양요, 한눈에 비교하기 📊
두 사건, 헷갈리시죠? 표로 간단하게 비교해 드릴게요!
| 구분 | 병인양요 (1866) | 신미양요 (1871) |
|---|---|---|
| 상대 국가 | 프랑스 🇫🇷 | 미국 🇺🇸 |
| 원인 (명분) | 병인박해 (자국 선교사 처형) | 제너럴 셔먼호 사건 (자국 상선 침몰) |
| 주요 격전지 | 문수산성, 정족산성 (승리) |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패배) |
| 주요 인물 | 양헌수 (조선), 로즈 제독 (프랑스) | 어재연 (조선), 로저스 제독 (미국) |
| 결과 | 프랑스군 퇴각, 외규장각 도서 약탈 | 미군 퇴각, 척화비 건립 (쇄국 강화) |
왜 하필 '강화도'였을까? 🗺️
두 차례의 큰 전쟁이 모두 '강화도'에서 벌어진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강화도는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바닷길인 '한강'의 입구를 지키는 **최종 방어선**이었습니다.
서양 함대가 수도인 한양을 직접 위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화도를 먼저 뚫어야 했습니다. 조선 역시 이곳이 뚫리면 나라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강화도 해안을 따라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등 수많은 포대를 설치해 두었죠.
즉, 강화도는 조선의 '목구멍'과도 같은 가장 중요하고 상징적인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쇄국의 상징, '척화비'가 세워지다 🚫
프랑스도 물리치고, 미국도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우리의 강력한 의지가 저 오랑캐들을 물리쳤다!"라고 확신하게 되었죠.
신미양요 직후,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쇄국 의지를 전 국민에게 알리고자 전국의 중요한 길목에 비석을 세웁니다. 이것이 바로 **'척화비(斥和碑)'**입니다.
📝 척화비의 비문 내용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이 비석은 흥선대원군 쇄국정책의 강력한 상징이자, 당시 조선이 얼마나 절박하게 문을 닫으려 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병인양요 & 신미양요 핵심 요약
자주 묻는 질문 ❓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서양의 거대한 힘 앞에 나라를 지키려 했던 조선의 처절한 저항이었습니다. 비록 이로 인해 근대화의 기회를 놓쳤다는 비판도 받지만,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던 그들의 항전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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