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왜 서양에 문을 닫았을까? (병인양요, 신미양요)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왜 나라의 문을 닫았을까요? 서양 세력이 밀려오던 19세기, 조선은 왜 강경한 '쇄국'의 길을 택했을까요? 21세기 지금, 다시 돌아보는 흥선대원군의 정책과 그 격동의 시대를 자세히 알려드립니다.

역사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19세기 조선은 참 다사다난했던 것 같아요. 어린 고종을 대신해 아들(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시기였죠. 그는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부패한 세력을 몰아내고 서원을 철폐하는 등 개혁을 단행했지만, 밖으로는 그 누구보다 강경하게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바로 '쇄국정책'입니다.

왜 흥선대원군은 서양 세력과의 교류를 '독'처럼 여기고 그토록 격렬하게 저항했던 걸까요? 오늘은 그 배경과 주요 사건들을 통해 쇄국정책의 모든 것을 알아보겠습니다! 😊

 


서양 배가 나타났다! '이양선'의 공포 🚢

쇄국정책을 이해하려면 당시 조선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를 먼저 알아야 해요. 19세기 중반, 조선 해안에는 정체 모를 거대한 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모양이 이상한 배'라는 뜻의 **'이양선(異樣船)'**이라 불렀죠.

이들은 식량을 요구하기도 하고, 통상을 요구하며 대포를 쏘기도 했습니다. 이미 이웃 나라 청나라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소식은 조선 조정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서양 세력은 '교류'의 대상이 아닌, '침략'의 대상이었던 거죠.

여기에 더해, 조선 사회 내부에서는 '천주교(서학)'가 빠르게 퍼지고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신분 질서를 부정하고 조상 제사를 거부하는 천주교가 서양 세력의 침투를 돕는 내응 세력이라 판단했습니다.

💡 쇄국정책의 배경 요약
  • 외부 요인: 이양선 출몰, 아편전쟁 소식 등으로 인한 서양 세력에 대한 공포와 불신
  • 내부 요인: 천주교 확산을 국가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

 

천주교 박해와 프랑스의 침공 (병인양요, 1866) 🇫🇷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뿌리 뽑기 위해 대대적인 박해(병인박해)를 감행합니다. 이때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포함해 수천 명의 천주교도가 처형당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합니다. 이것이 바로 **'병인양요(丙寅洋擾)'**입니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한양으로 진격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문수산성에서 한성근 부대, 정족산성에서 양헌수 부대가 프랑스군을 격파하며 결사항전했습니다. 결국 프랑스군은 큰 성과 없이 물러나게 되죠.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강화도의 외규장각 도서 등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갔습니다. 😥

⚠️ 잠깐!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6)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직전, 평양에서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횡포를 부리다 평양 감영 군민들에 의해 불타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5년 뒤, 더 큰 전쟁의 불씨가 됩니다.

 

미국 함대의 침공 (신미양요, 1871) 🇺🇸

5년 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이번에는 미국이 아시아 함대를 총동원해 강화도를 침략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미양요(辛未洋擾)'**입니다.

미군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초지진, 덕진진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강화도의 핵심 방어기지인 '광성보'에 도달했습니다. 이곳에서 어재연 장군과 조선군은 수적 열세와 무기의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어재연 장군의 '수(帥)'자 깃발이 유명하죠)

결과는 조선군의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와는 절대 협상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미군은 전쟁의 목적(통상 조약)을 달성하지 못한 채 결국 스스로 물러나게 됩니다.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 (척화비) 🚫

프랑스도 막아냈고, 미국도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우리의 의지가 저 오랑캐들을 물리쳤다!"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신미양요 직후,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쇄국 의지를 전 국민에게 알리고자 전국의 중요한 길목에 비석을 세웁니다. 이것이 바로 **'척화비(斥和碑)'**입니다.

📝 척화비의 비문 내용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이 비석은 흥선대원군 쇄국정책의 강력한 상징이자, 당시 조선이 얼마나 절박하게 문을 닫으려 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쇄국정책, 과연 최선이었을까? (평가) 🧐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토론을 낳고 있습니다.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긍정적 평가 (단기적) 👍 부정적 평가 (장기적) 👎
서양 열강의 침략 야욕을 일시적으로 막아내고, **국가 주권을 수호**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세계 정세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자주적인 근대화(개혁)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천주교 확산에 따른 국내의 사회적 혼란을 막고 **유교적 질서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결국 일본의 무력(운요호 사건)에는 굴복하여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1876)**을 맺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때는 대원군이 물러난 직후)
💡

쇄국정책 핵심 요약

✨ 배경: 이양선 출몰천주교 확산에 대한 위기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주요 사건: 프랑스의 침공(병인양요, 1866)과 미국의 침공(신미양요, 1871)을 겪었습니다.
🧮 정점 (척화비):
"서양 오랑캐와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 (주화매국)
👩‍💻 평가: 단기적으로는 주권을 수호했으나, 장기적으로는 근대화 기회를 상실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

Q: 흥선대원군은 왜 천주교를 그렇게 싫어했나요?
A: 표면적으로는 조상 제사를 거부하는 교리가 유교적 질서에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깊게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국내 정치에 개입하려 하거나 천주교도들이 서양 함대와 내통하려 한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천주교를 '외세와 결탁한 위험 세력'으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Q: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조선이 이긴 건가요?
A: 군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정치/외교적으로는 '승리'(혹은 방어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병인양요는 정족산성 등에서 조선군이 승리하며 프랑스군을 몰아냈습니다. 신미양요는 미군이 광성보를 점령하며 군사적으로는 이겼지만, 조선이 끝까지 협상을 거부하자 결국 아무런 소득(통상 조약) 없이 스스로 물러났습니다. 대원군 입장에서는 "우리가 버텨서 이겼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된 거죠.
Q: 쇄국정책은 결국 실패한 정책 아닌가요?
A: 결과론적으로 볼 때, 쇄국정책은 조선이 스스로 근대화할 타이밍을 놓치게 만들었고, 결국 더 강력한 무력을 갖춘 일본(운요호 사건)에 의해 강제로 개항(강화도 조약)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실패한 정책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침략이냐, 교류냐'의 갈림길에서 '저항'을 택했던 절박한 몸부림이었습니다. 비록 시대의 흐름을 막지는 못했지만, 나라를 지키려 했던 그의 강력한 의지만큼은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네요.

더 궁금한 역사 이야기가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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